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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역사적 의미와 관용사 일본인 비석의 의의

기사승인 2020.01.16  11: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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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의 "비석의 역사적 의미와 관용사 일본인 비석의 의의"는 부산교수불자연합회 회장인 동아대학교 장상목교수가 정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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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띠벌 잡지 박원호 편집장의 대마도(對馬, 일본명 ‘쓰시마’)에 세운 우리나라 관련 비석들에 관하여 ‘비석은 자석처럼 힘이 세다!’ 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비석의 의미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관광지의 여행지로써의 가치를 떠나, 비석 존재 자체만으로 역사적 탐방도 하게 된다는 저자의 글을 읽고 나름대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소개된 정영호 박사는 1977년부터 일본 대마도를 200여회 방문해 한국 문화 유적을 발굴했다. 그리고 정영호 박사와 그의 스승인 황수영 선생은 일본인 전문가들과 함께 대마도 한국선현 현창회를 만들어 대마도를 거쳐 간 우리 선현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대마도를 배경으로 펼쳐진 역사적 사실을 왜곡 없이 바르게 후세에 전함으로써 한일 친선교류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다. 1986년 ‘대한인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 순국비’를 시작으로 백제 왕인(王仁) 박사, 조선통신사, 신라국사 박제상(朴堤上, 363-419) 등 대마도를 거쳐 간 선현을 기리는 기념비 10개를 세웠다. 2004년에는 대마도 주민 20여 명이 정영호 박사의 섬 100회 방문을 맞아 한·일 교류사 연구와 친선에 애써온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강사로 활동했으며, 정영호 박사의 해설을 들은 교사는 5200여명, 일반인 1900여명에 이른다.

대마도 대아호텔앞의 정영호박사 100회방문 기념비.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왼쪽)과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오른쪽)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지비(왼쪽)와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오른쪽)
백제 왕인 박사 현창비

2011년에 세워진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通信使 黃允吉 顯彰碑)',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고 적힌 순국비, 덕혜옹주의 기구한 삶이 깃든 ‘결혼 봉축비’,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지비’, ‘백제 왕인박사 현창비‘ 는 두고두고 새겨볼 일이다.

특히, 1905년 10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몸소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체포 압송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으나, 마지막까지 조선의 선비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보면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일제의 온갖 회유와 강압에도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저항하다 유배된 지 4개월 만에 결국 아사 순국하였다. 수선사는 아사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시신이 조선으로 운구 되기 전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렇듯 비석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민간 교류와 관광을 활성화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 일본인들의 비석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대마도는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에도를 갔다 오는 도중에 며칠씩 잠깐 머물렀던 것이 전부이지만, 초량 왜관에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를 비롯하여 평상시 400여명의 일본인들이 무려 200년 이상 머물렀던 곳이었다. 그런데도 부산지역에 일본인 비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호 편집장은 부산에 초량 왜관 전시관을 설립하고 초량 왜관과 관련 핵심 역할을 한 일본인들의 비석을 세움으로써, 일본 관광객 유치 활성화뿐만 아니라, 민간 교류 활성화의 계기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부산 천마산 관용사 주지이신 천상스님께서 일본인 비석을 발굴하여 비석 조상 인물과 후손 찾기 운동을 펼친다는 소식을 접하여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1910~45년)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에 형성된 부산광역시시 서구 아미동 주택가인데, 한국 전쟁의 피난민들이 방치된 비석을 건축 자재로 사용하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관룡사의 경내에서도 비석이 계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주지이신 천상스님께서 비석을 떼어내 조사할 때, 신도들로부터 “자택 주변에도 비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 사이에 있는 돌담에서 비석 모양의 돌을 발견하여 뽑아보니 문자가 선명하게 남아있어, 절에 가지고 보관하여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일 교류단체 등의 협력을 얻어 스미나가(住永)씨의 정보를 모았다.

관룡사 주영차우위문(住永次右衛門, 스미나가지우에몬 すみながじえもん) 비석

천상스님은 한일우호교류회 최선길 회장님의 도움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객원연구원 사카이 마사요(酒井雅代) 박사와 광주여대 정성일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나고야대학원의 사카이 마사요 박사 연구원(조일 관계사)의 논문에서, 1817~18년에 최상위 조선어 통역사 ‘대통사’와 동등한 지위로 인정된 ‘대통사격(大通詞格) 정대관(町代官)’이라는 보직에 ‘주영치우위문(住永治右衛門)’이란 인물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사카이씨에 의하면, 스미나가 집안은 대마도에서 조일교역에 종사하는 특권상인의 집안이라고 한다. 일족은 어릴 때부터 조선어를 배우고 가업을 이었거나 쓰시마번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정대관은 무역을 담당하는 그 지역 출신들의 직책으로 “어학에 능통했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할 때에는 통역도 했을 것이다.”라고 추측된다.

조일교역에 해박한 광주여대 정성일 교수에 따르면, 에도시대에 대마도가 조일 교역의 거점으로서, 현재의 부산시에 위치한 초량왜관의 기록 ‘쓰시마 종가문서’의 관수일기에도 ‘주영치우위문’이 등장한다고 하였다. 스미나가씨는 1822년 1월 4일 별세하여 복병산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묘비의 ‘주영차우위문’과 관수일기의 ‘주영치우위문’는 한 글자 다르고, 사망 날짜도 1822년 1월 3일과 1월 4일로 하루 차이가 나지만, 정성일교수는 “동일 인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민간연구단체 ‘부산 초량왜관 연구회’에 따르면 당시 복병산에 있었던 일본인 묘지가 아미동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스미나가씨의 묘소도 그때 이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부산 초량왜관 연구회 강석환 회장은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 진실 되게 어울린다.”는 쓰시마번 조선외교의 이념 ‘성신교린(誠信交隣)’을 언급하며 “묘비의 발견은 한일간의 ‘성신교린’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전문가의 보다 자세한 연구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인연이 가장 소중하다고 할 것이다. 천상스님과 일본인 비석과 인연으로 인하여 부산 서구의 비석문화마을에 있는 일본인 비석 발굴하여 추모공원이 조성되어진다면 현재 어려운 한일관계를 극복하고 한일 우호 증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앞으로 이러한 민간 노력으로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하여 본다. 이 글은 다음 자료를 많이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대마도에서 꼭 알아야 하는 것”, 최영미
“대마도 역사 탐방기”, 강성열

정태권 tgjeong@km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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