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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화 허은정님의 스리랑카 불교성지순례 제5화(마지막회)

기사승인 2019.05.20  18: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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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화 허은정님이 2017년 2월 18일부터 2월 24일까지 전국교사불자연합회 회원으로 스리랑카 불교성지순례 여행에 동참하여 견문한 내용을 싣는다. 오늘은 제5화로 마지막 회인데 스리랑카 다섯째 날과 여섯째의 불교성지 순례기를 게재한다. 이하는 허은정님의 글이다.

우담화 허은정님 스리랑카 불교성지 순례지(구글지도에 표기)

2017. 2. 22 (수)

마지막 전 날 갈레로 가는 길에 홍차밭을 들렀다.

★ 홍차밭

스리랑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홍차를 생산하는 나라이며 생산되는 홍차를 실론티라고 부른다. 1867년 영국의 식민지 시대 스리랑카에서는 커피가 많이 재배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곳에 전염병이 퍼지면서 커피나무가 모두 죽어 버리자 영국 총독부는 커피나무를 잘라내고 그 곳에 차나무를 심은 것이 차 재배의 시작이다.

홍차밭에서

최초의 차 농장은 캔디 동남부 ‘루레콘데라 이스테이트’ 로 1867년 영국인 ‘제임스 테일러’ 에 의해 재배가 시작되었다. 좋은 차의 생산을 위해서는 따뜻한 기후, 적당한 고도, 배수가 용이한 경사지, 알맞은 습도가 요구되는데, 스리랑카 고원지대는 이러한 자연환경에 최적으로 대규모의 차 농장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확기에는 손으로 직접 채취해야 하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차의 수확은 대부분 남인도에서 이주해온 타밀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다. 수확된 차는 차 공장으로 옮겨져 건조, 분쇄, 발효, 그리고 다시 건조의 과정을 통해 품질별로 분류 포장되어 완성된다.

★ 파아나두라 대논쟁

1800년대의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왕실의 보호하에 있었으며 국교로서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영국 왕실에 양도한 1815년의 캔디조약 제5조에는 ‘불교불가침·보호’가 기록되어 있다. 식민지 지배의 실권을 얻은 영국도 처음에는 불교 승단을 보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에 대해 영국 기독교 교단은 항의를 하여, 기독교 정부가 불교의 전통을 인정함은 대단한 잘못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불교의 활동은 제한되고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강제화 되었다. 출생한 아기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주민으로서 등록할 수가 없었으며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방법을 통해 기독교는 원조를 받았으므로 불교도로서의 자존심은 손상되고 자립성도 잃게 되었다. 기독교의 선포는 스리랑카인의 문화와 아이덴티티에 관계되는 문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불교도들이 위기감을 갖게 됨은 당연한 것으로서, 자신들의 전통을 재검토하고 불교도로서의 자각을 촉구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기독교인을 상대로 교리의 옳고 그름, 적부적(適不適)을 논하는 대론도 행해졌다. 1865년 밧데가마에서의 논쟁, 1866년 우단비타에서의 논쟁, 1871년 감플라에서의 논쟁 등이 그것이며, 이런 여러 논쟁의 귀결이 파아나두라에서의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의 승리는 당시 스리랑카 불교도들에게 불교도로서의 긍지를 되찾게 해주고 대단한 자신감과 기쁨을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불교측 대표 구나난다 스님의 동상(피아나두라)

스리랑카의 조용한 마을 파아나두라에서 1873년 8월 26일 오전 8시~10시(첫번째 논쟁), 오후 3시~5시(두번째 논쟁) 1873년 8월 28일 오전 8시~10시(세번째 논쟁), 오후 3시~5시(네번째 논쟁) 종합 8시간 동안 불교의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스님과 기독교 ‘데이비드 데실바’목사 및 ‘시리만나’전도사의 논쟁이 있었다.  각자 상호 한 번에 1시간씩 종합 4회 4시간씩 자신의 시간을 갖고 논쟁한 것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자초지종을 기록한 영문 번역을 읽은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의 영웅이였던 기독교신자 ‘올코트’대령이 구나난다 스님의 거듭해서 설하는 도리에 감격한 나머지 불교 신자가 되어 결국 스리랑카에 건너갔다. 자기 스스로 1880년도에 인도 마드래스에 ‘불교 영지 협회’를 설립하고 잃어버린 고귀한 정신문명의 해명에 헌신했다. 여기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불교 부흥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다르마파아라’이다.

논쟁이 행해졌던 장소에 세워진 랑콧트 사원(파아나두라)
미국인 육군대령 올코트 동상(콜롬보역 광장)

구나난다 스님이 미국의 올코트 대령을 정신적으로 각성시킨 것은 일본에서도 편협된 폐불 정책의 움직임을 시정하고 국수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버려 세계를 바라보는 보편주의적인 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메이지 11년 하라탄잔스님이 동경제국대학에서 ‘대승기신론’을 강의한 것이 불교 부흥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올코트 대령의 영향이다.

1873년 8월 26일과 28일 양일간 1만 명의 군중들 앞에서 행해진 이 종교적 논쟁은 ‘대화’가 아닌 ‘대론’이며 ‘논쟁’이다. 우연히 스리랑카에 왔던 미국의 학자 피블스(J·M Peebles)박사가 뒷날 저술한 ‘The Great Debate, Buddhism and Christianity, Face to Face’(Colombo 1955)의 서문에서 (불교·기독교)양측 모두 자신들의 지원자를 가지고 있어 언제나와 같이 양방이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파아라 동상(비하라 마하디비 공원)

불교측 승려는 인성과 태도가 훌륭한 대론자이며 일반 민중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하고 군중들을 자신에게 끌어 들였다. 일부 기독교인이 논쟁 결과에 불만족이였던 것은 확실하다. 또 페레라(H·R Perera)는 “논쟁이 불교측 승리로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Buddhism in Ceylon, Kandy, 1966, P69.>

파아나두라 논쟁은 ‘대론’이 ‘대화’로 발전하는 역사의 귀중한 증언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논쟁은 스리랑카인에게 불교도로서의 긍지와 자신을 불러 일으켰으며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감명을 주었으며 스리랑카를 불교국으로서의 명맥을 명실상부하게 유지하고 현대 테라바다의 불교, 즉 남방 상좌부불교의 재생에 공헌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리랑카의 운명을 바꾼 대 논쟁이었다.

‘갈레’를 향해 가는 전용버스 안에서 현지가이드 ‘수지와’님께서 ‘파아나두라 대논쟁’ 설명을 자랑스럽게 하셨다. 감명 깊게 듣고, 귀국하여 ‘파아나두라 대논쟁’ 책을 구하여 읽고 참조하였다.

★ 갈레(Galle)

갈레는 콜롬보에서 115km 남동쪽에 위치한 스리랑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네델란드 시대에 건설된 성채와 등대가 있는 역사도시이며, 최대의 항구도시이다. 2000년 전부터 동서 문물교류의 중심지로 자리하고 있던 갈레는 성서시대의 전설에도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시바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곳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 사절단의 배가 도착한 곳이 이곳 갈레 항이었다.

1505년 포르투갈 동방 함대가 이곳에 닻을 내리면서 무역항으로 개발되었다. 몰디브를 점령한 포르투갈 함대가 스리랑카 남부에 첫 상륙을 한 후 수탉 우는 소리는 듣게 되어(포르투갈어로 수탉을 ‘Galo’ 라고 하므로) ‘갈레’라고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포르투갈은 1640년 네덜란드에게 지배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이곳을 점령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쌓은 성채를 부수고 1663년 새로이 36헥타아르 면적의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였다. 이때 쌓은 네덜란드의 성채가 현재 갈레의 성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다.

갈레 포트에서

갈레의 역사는 스리랑카에 굴욕적인 피지배의 역사를 품고 있지만 지금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갈레 포트(Galle Fort)는 유네스코에서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해안에 있는 성채이다. 적갈색의 석조 시계탑과 높은 벽으로 구시가지와 바다를 둘러싼 모습인데 성채에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인도양으로 튀어나온 반도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래카다이브 해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갈레성 내부 대부분의 오래된 건축물은 네덜란드 시대 때 건설된 건축물로 지금은 대부분 박물관과 기념품을 파는 상가, 식당으로 바뀌어 있다.

버스 안에서 외국인을 환영해주는 어린이들

오후 4시 쯤 우리 일행 버스가 에덴리죠트호텔로 가는 중, 앞의 스리랑카 시내버스 뒷좌석에서 남자 어린이 5명이 일어서서 뛰면서 두 손 흔들고 춤추며 외국인인 우리 일행들을 환영하는 모습이 큰 감동을 주며 귀여웠다. 나도 같이 손 흔들며 답례했다. 초등학교를 평생 재직해서 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 아이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 에덴 리죠트․스파호텔(THE EDEN RESORT & SPA HOTEL)

스리랑카 여행의 마지막 밤은 해변 휴양지 에덴 리죠트에서 보냈다. 에덴 리죠트는 스리랑카 남서쪽 해변 백사장에 자리하고 있어서 숙소에서 보이는 풍경이 마치 예쁜 엽서 한 장을 보는 듯 했다.

우리 일행은 저녁 식사 후 여행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수영장 옆의 나눔의 장소에 모여 여행의 느낌 등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룸메이트 이효춘 선생님과 둘이서 10시가 넘은 시간에 인도양의 래카디이브 해가 보이는 해변으로 나갔다. 부드럽게 느껴지는 모래가 신기했다. 모래의 입자가 너무 부드러워서 아기 피부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흰색 커튼과 레이스로 샤방샤방하게(반짝반짝 빛나게) 만든 부스가 있었다. 청춘남녀가 프로포즈도 하고, 신혼여행 커플들이 가슴 설레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가족여행 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스리랑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 인도양 해변에서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를 느끼며 걷고, 목청껏 노래도 부르고, 파도와 술래잡기도 하며 멋진 시간을 보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해변의 밤이었다.

2017. 2. 23 (목)

베루웰라를 출발하여 콜롬보로 향함.

★ 콜롬보(Colombo)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이다. 콜롬보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되는데 고대에 싱할라 왕조의 임시 수도였던 적이 많았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수송의 중계지로 발전해 왔고 지금은 이 나라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인구는 약 200만명이 거주한다.

콜롬보 거리

1985년 1월 28일 콜롬보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스리 자야와르데네푸라 코테’ (줄여서 ‘코테’ 라고 부름.) 라는 새로운 수도가 생겼지만 실질적인 수도는 콜롬보이다. 콜롬보는 상업과 행정적인 기능을 하고, 코테는 정치적 입법기능을 가지도록 분리하였다.

대로변에 LG TV가 설치되어 있어 반가웠다. 차량도 많고 사람도 많고 거리도 혼잡하다. 높은 건물도 많이 보이고, 아파트 건축이 한창이다. 버스 투어로 콜롬보 시내 관광을 했다. 어느 곳이고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지 이곳도 부자들만 사는 동네인 7번가가 있다고 한다.

콜롬보 시청은 2층의 백색 건물로 중앙에 높은 돔으로 되어 세련되고 멋스럽다. 로터리에 석주가 우뚝 서 있는데 내전 때 돌아가신 분들의 위령탑이라고 한다. 곁에는 수목이 우거진 식물원이 자리를 잡고 있어 도시 경관이 아름답다. 영국 식민지배로 부터 1948년 2월 4일에 독립한 기념으로 세워진 독립기념관이 우뚝 서 있는데 이 기념관은 싱할라 캔디 왕조의 건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까마귀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날아다닌다. 전기 줄이나 지붕 위에도 떼로 앉아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 까마귀를 길조로 여긴다. 음식쓰레기를 까마귀들이 먹어 치우는데 청소부들의 고생을 조금 덜어 준단다.

각국 대사관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을 지난다. 영국대사관 그 옆에 크게 지어진 중국 대사관도 보인다. 대사관 크기로 그 나라의 위상을 짐작되기도 한다. 한국 대사관은 단층 건물이고 대문에 태극마크 2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 켈라니아 사원(Kelaniya)

켈라니아 강변에 있는 켈라니아 사원은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장소로 현지어로는 ‟라자마하비하라” 로 불리며 위대한 왕의 사원이란 뜻인데 2500년전 부처님께서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목욕하시고, 설법을 한 세 곳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 전 후의 시기라고 하는데 후에 힌두교 침입자들에 의해 본래 사원은 파괴되고 다시 복원되었으나 16세기 포르투갈 기독교도들에 의해 또 파괴되고 현재의 모습은 19세기 때 복원된 사원의 모습이다.

경내는 크고 넓으며 원형의 백색 대탑은 기원전 3세기 부처님께서 앉아서 설하신 장소라고 전한다. 법당 안에는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와 보살상들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으며 부처님이 이곳 방문하신 장면을 묘사한 벽화, 인도에서 보리수를 가져오는 장면 벽화가 있다. 선정인 자세의 좌불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와불이 모셔져 있다.

보리수가 있는 동서남북에 불자들이 항아리에 물을 담고, 향을 피워 들고 보리수가 오래 살도록 물공양, 향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또, 개인, 가족끼리 앉아서 촛불을 밝히고 경을 독송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후 10시 30분까지 개방한다고 하니, 대중을 위한 생활 불교인 것이다.

불상 배경은 히말라야 산

부처님께서 직접 다녀가신 곳이어서 업장소멸이 되는 사원으로 유명하다. 절 안이면 법당이 아니라도 어디라도 보리수 둘레나 법당 둘레에 앉아 개인이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고 있다. 야단법석이 자연스레 이뤄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곳 사원에는 힌두교의 신상들도 있는데 이것은 민중 속에서 함께하는 힌두교와 불교의 공존을 의미하는 상징물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 부처님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두루투 페라헤라’ 라는 큰 축제가 열린다.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던 ‘토투게무누’ 대왕의 어머니 ‘비하라 마하 데비’ 는 켈라니아 출신으로 스리랑카의 여인상이 된고 있다. 켈라니아 사원내에 스리랑카의 역사적인 일을 벽화로 많이 표현하였다. 겔라니아 사원의 벽화를 거의 다 그린 훌륭한 화가에게 왕은 히말라야를 다녀오지 않았다고 직접 보지 못한 것을 그리지 말라고 하며 인도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리게 한 것에 충격을 받은 화가는 그 이후에는 그림을 다시는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훌륭한 솜씨를 가진 화가에게 많은 제약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멋진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일이 되기도 한다. 불상 뒤 배경은 히말라야 산을 벽화로 표현했다.

켈라니아 사원에 참배하러 온 학생들
부처님께서 켈라니아 강에서 목욕하신 후 가사를 입으셨던 곳

2월 19일 일요일 사원에 갔을 때는 불교학교 선생님들께서 인솔하여 학생들을 사원에 데리고 오고, 평일 오늘은 학교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인솔하여 사원에 와서 참배시키고 인성지도를 하시는 것을 보고 부러웠다.

부처님 오신 사원이기 때문에 켈라니아 사원에서 기도하면 모든 업장 소멸된다고 한다.

★ 강가라마 사원(Gangarama Maha Vihara)

강가라마 사원은 베일라 호숫가에 있는 ‘물을 다스리는 왕’ 이란 뜻을 가진 사원이다. 사원의 설립은 1885년 스리랑카 불교 재건 운동을 주도한 ‘히카두웨 스리 나야카’ 스님에 의해서이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맥이 끊겨 수계마저도 태국, 미얀마 승려들로부터 받아야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고 스리랑카 불교재건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가 불교재건을 위해 첫 번째로 시작한 것은 교육으로 1873년 남부 해안에 ‘비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7명의 학생에게 불교 철학, 산스크리트, 팔리어 및 스리랑카 전통문화를 가르쳤다.

그리고 1875년 콜롬보에 ‘비다랑카 피리베나’ 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입학생이 점차적으로 늘어 이들이 졸업 후 스리랑카 불교를 이끌게 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강가라마 사원 박물관

그가 처음으로 설립한 ‘비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는 후에 ‘코테 대학’으로 발전하였고, 두 번째로 설립한 ‘비다랑카 피리베나’ 학교는 ‘켈라니아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가 머물며 경전을 간경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원이 강가라마이다. 그래서 강가라마 사원의 역사는 100여 년 밖에 안 되지만, 스리랑카 불교 재건에 중요한 모태가 되는 성스러운 사원이다.

현재 대법당과 역대 조사들의 흉상, 유물이 보존된 박물관(여러 국가들이 보내온 유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불상 등), 그리고 부도 탑, 세계 각국의 귀중한 불교 문화재와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물관 등이 있다.

매년 2월 보름 ‘나밤 마하 페라헤라’ 라는 큰 축제가 열리는데 이 축제기간 중에는 캔디의 ‘페라헤라’ 축제처럼 코끼리 등에 부처님 사리를 얹고 시가지를 행렬한다.

강가라마 사원 법당

강가라마 사원을 끝으로 스리랑카 성지순례의 모든 일정을 끝나므로 부처님 전에 정성껏 예불 드린 후 콜롬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그동안 정들었던 현지가이드 ‘수지와’님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고 청사내로 들어갔다.

출국심사 때, 플로나루와에서 구입한 흑단목 막대기가 문제였다. 동료가 나를 돕는다고 영어로 ‟다리가 아파서 막대기가 있어야 걷고 없으면 걸을 수 없다.” 고 과장된 말로 엄살을 부려 표현하여, 가이드 ‘핀투’님과 함께 의료차에 타서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 날개 있는 옆문으로 바로 탑승했다. 난생 처음 겪은 일이다. 나를 위한 동료의 배려가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KE474로 콜롬보에서 약 8시간 걸려 24일(금) 06:15 인천공항 착륙하였다. 전원 무사히 귀국하여 헤어지기 아쉽지만 각자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새 학기 준비 등 일상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저작권자 © e불교중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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