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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 불교

기사승인 2019.04.30  16: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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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7일 부산 교수불자연합회 회장 동아대학교 장상목 교수가 천태종 삼광사(주지: 세운스님)에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 불교”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장교수는 부산교수불자연합회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대학생불자 활성화를 위하여 다양한 불교 행사를 시행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불교의 역할”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하였는데, 과연 불교가 이 변혁 시대에 시대정신으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계에서 청년 불자들의 감소를 걱정하면서 불교의 미래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지만,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사상과 종교는 도태되는 것이 역사의 진리였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과연 불교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으로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지 장 교수의 특강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하는 장교수가 직접 작성한 특강 내용이다.

삼광사 지관전에서 특강하는 장상목교수
장교수 특강을 경청하는 삼광사 신도들

1.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시대상

도구를 만드는 인간인 호모 하빌리스(Homo-habilis)는 처음에는 인간은 오감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나무와 돌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자신을 보호하면서 생존하였다. 그런데 현대인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시공간을 초월하여 정보를 받아들이고 커피라는 도구를 가지고 자신을 보호하면서 생존한다. “한손에 스마트폰, 또 다른 한손에 커피”라는 슬로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왜 커피인가? 잠 오는 것을 막고 깨어있기 위해서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세상 모든 정보를 찾아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사유한다.

세상의 모든 정보들을 공유하면서 깨어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삶이 노예의 삶이라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극복할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21세기 4차 산업혁명과 시대정신을 고찰하는 것은 불교를 떠나서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호모 하빌리스(Homo-habilis), 신대우 알앤비디파트너스 강의자료 중에서 발췌
노예의 삶에 익숙한 젊은이들, 한국일보에서 발췌

2. 21세기 신흑사병 ‘정보전염병(infodemics)’의 출현

발명이나 기술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며 그 내용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밀스럽게 전수하던 이전에는 놀라운 지식들이 사장되곤 하였다. 하지만 정보는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의 귀라고 대나무 숲속에서 외쳤던 복두장의 외침처럼 스스로 확산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현대 정보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정보가 인터넷과 SNS를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와는 전혀 다른 바이러스나 악성루머, 잘못된 정보나 소문이 매우 빠르게 확산돼 경제, 정치, 안보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위기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 정보의 확산으로 빚어지는 각종 부작용을 정보전염병(infodemics)이라고도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정보전염병 현상을 비유하여 “전단지 공화국”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었다.

개봉영화의 홍보사진 : 특종추적스릴러 나이트크롤러 - 조작된 뉴스
법인 스님 저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표지

능동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정보가 확산되는 것은 정보의 다양성, 편리성, 선택성, 전문성, 그리고 확실성에 기인한 효율적인 측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들의 삶은 자기 상실과 주체성 상실, 자의식 상실의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하면서 정보에 대한 노예의 삶에 익숙하여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우려의 심각성이 점점 더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러한 측면에서 불교의 가능성과 역할이 중차대하다고 할 것이다. 법인스님은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을 불교에서 찾고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불교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으로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인가?

3.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윈도우(문)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빌 게이츠가 컴퓨터 운영체계를 개발해 ‘윈도우’라고 명명한 것에 있을 것이다. ‘윈도우’로 상징되는 네트워크 중심의 사회란, 울타리가 제거된 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시공간을 초월한 글로벌적 상호소통이 가능하고 생명력을 발휘하는 사회일 것이다. ‘윈도우’에서 스마트폰으로 발전하면서 시공간을 초월한 글로벌적 상호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자기 스스로 “윈도우”를 열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과 교류를 하게 되고 세상을 소유하게도 된다. 이젠 “문을 얼마나 자주 열 것인가?” 가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또 다른 관심은 "정보로 이루어진 사이버 영토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이다. 사이버영토를 확보한 기업과 개인이 21세기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세계 최고 기업들이 모두 IT 관련 기업이다. 대표적인 네이버, 다음, 야후, 그리고 구글을 살펴보자. 이들 사이트의 바탕 화면을 비교하여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네이버, 다음, 야후의 바탕 화면에는 주어진 정보로 가득 차 있지만 구글에는 어떠한 정보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내가 원하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비로소 그에 적절한 정보들을 제시하여준다.

마이크로소프 윈도우 초기화면의 예
검색엔진 네이버의 초기화면 예 (사용자에게 잡다하게 이것저것을 보여주는 화면)
검색엔진 구글의 초기화면 예 (사용자를 기다리는 단순한 화면)

네이버, 다음, 야후는 그들이 제시한 정보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을 강요하는 느낌이라면, 구글은 자기 스스로 찾는 정보에 대한 서비스를 받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강요된 정보보다 스스로 찾은 정보에 충성도가 높은 것이다. 그래서 구글이 IT의 최고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우리 삶도 그럴 것이다. 마치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같이 아무 것도 없다가 키워드라는 시절인연을 만나면 모든 것이 펼쳐졌다가는 시절인연에 따라 다시 사라지는 것과 흡사하다.

4. 어떤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가?

상시 문을 열면서 상호 소통 가능하여야 발전이 가능한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럼 어떤 자세로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가?

금강경에서 상호 문을 열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상대를 인정하고 나를 낮추는 훈련을 하여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금강경 첫 부분에 세존께서는 진지 드실 때가 되자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손에 드시고 사위국의 큰 성에 들어가시어 진지를 구걸함에 그 성안에서 차별이 없이 한 집씩 차례로 걸식을 다하시고 다시 본처로 되돌아오셨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심인가?

견성성불하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닦아야한다고 하며, 팔정도를 행하여야한다고 하며, 사상을 여의어야한다고들 한다. 이 모든 수행의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자기를 버리는 하심(下心)함에 있다. 하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나라는 자만심과 아상을 여읠 수 없으며 육바라밀과 팔정도를 닦을 수도 없는 것이다.

걸식을 하는 행위가 자기를 낮추는 하심수행인 것이다. 차별이 없이 한 집씩 차례로 걸식함은 모든 사람들 평등하게 인정하고 공경하는 동체평등의 발로인 것이다. 다시 본처로 되돌아오심은 초지일관하시는 초심을 잊지 않음이요, 본성자리를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근본 지혜를 가지고 타인을 인정하고 자기를 낮춤으로써 비로소 시공간을 초월한 글로벌적 상호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불교의 수행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현실 세계에서도 글로벌적 상호소통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아상과 아만심이 사라져야 비로소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본 메이지시대의 저명한 한 학자가 난인(南隱) 스님을 찾아와서 물었다. "선(禪)이 무엇입니까?" 스님은 묵묵히 차를 만들어 학자의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학자의 잔은 곧 차로 채워졌으나 스님은 계속 차를 따랐다. 넘치는 차를 바라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학자가 소리쳤다. "스님! 차가 넘칩니다. 그만 따르시지요." 남은 스님이 말씀하시었다. "이 찻잔과 같이 그대의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고집으로 가득 차 있소. 그대가 마음의 잔을 비우지 않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선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수 있겠소?"

불교에서 사찰로 들어가는 문을 산문(山門)이라고 한다. 산문은 한 줄로 세운 기둥 위에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는 일주문(一柱門),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천왕문(天王門), 둘이 아닌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과 모든 괴로움과 헛된 생각의 그물을 벗어나 아무 거리낌이 없는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 해탈문(解脫門)으로 배치되어있다. 이런 문에 들어가서 문 안 세상의 주인이 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그리고 큰 스님들의 설법을 듣는 것을 법문(法門)을 듣는다고 한다. 죽은 글의 法文을 기계적으로 듣고 암송하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法門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 세상을 느끼고 깨달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아가서 법문의 문을 열고 열린 법문의 세상에 들어가 그 세상의 주체적인 주인공이 되라는 의미이다.

5.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가?

아인쉬타인의 말에서 山門을 열고 들어가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인쉬타인은 “과학의 발전은 문제해결 자체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형성하는 문제 찾기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물음을 던지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해답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 영화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던 올드보이 대사 중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가뒀을까? 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 란 말이야." 라는 이우진의 대사는 영화 올드보이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질문이 틀렸으니까 제대로 된 답이 나올 수 없었다.”에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고 한다. 질문이 답을 바꾼다고 하였다. 우리들도 어떻게 질문하느냐에 따라 발상을 전환할 수 있고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
사찰의 모습

마찬가지로 석가세존의 출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문유관(四門遊觀)도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인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보고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존재는 어째서 고통인가? 존재의 실체란 무엇인가?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라는 물음과 사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강연을 하는 “지관전”에서 “관음주송” 수행을 하는데,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이곳이 왜 “지관”일까? 저는 처음에 “지심귀명례”에서와 같이 지극히 관세음보살을 부른다고 하여 “지관(至觀)”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관을 멈춘다는 “지관(止觀)”이었다. 왜 “지관(止觀)”이라고 하였을까? 라는 물음이 공부의 시작이라고 생각된다.

“지관(止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정한 “지관(止觀)”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이런 물음에서 시작하여 “지관(止觀)”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관세음보살의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할 것이다.

(참고: 지관(止觀)은 대승기신론의 수행신심분과 같이 지(止)는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을, 관(觀)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지혜를 나타내는 합성어로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뜻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하나의 예로서 지관(止觀)이란 글자 자체에 물음을 갖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지관을 말한 것이다.)

6.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과 불교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울타리가 제거된 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시공간을 초월한 글로벌적 상호소통이다. 울타리가 제거된 문을 통하여 모든 정보, 기술, 그리고 지식들이 가감 없이 공개되고 공유되어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을 장유무서(長幼無序)라고 정의하였다.

과거에는 선각자에 의해 주입된 지식과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하여 암기하는 식으로 전수되어졌다면, 현재 정보화 시대에서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본인이 원하는 정보와 지식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이해하고 응용하려는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개방적이고 평등하여진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럼,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과 불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장유무서의 시대정신에서, 도브티니 교수가 주장한 이스라엘 창조경제의 원동력이라는 ‘후츠파 정신’이 연상된다. 모든 의견 반대해 보는 'NO 교육'인 후츠파 정신은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절대 권위를 부정하고, 현실에 바탕을 두고 철저히 의심하고, 연관관계를 찾고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후츠파 정신의 핵심을 숙고하여보면 자연스럽게 불교의 핵심사상을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석가세존께서 사람 수보다 신의 수가 많은 신의 나라, 인도에서 “일체중생 개유불성,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타일시 성불도, 중생 개공성불도”를 외치며 신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를 가르치시며, 곤고하였던 신분제도를 타파하여 모든 생명이 동체 평등함을 역설하시었다. 이렇게 석가세존께서는 절대권위인 신의 울타리, 신분의 울타리, 남녀의 울타리, 배움의 울타리, 질병의 울타리, 심지어 서열의 울타리마저 무너트리고 절대적 동체평등을 주창하시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현실세계에서 완벽한 장유무서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둘째, 불교에서는 진리의 문을 여고 들어가는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계신다. 진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사유하여야 한다. 화두공안 수행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져 궁극적 해답을 찾는 방법의 핵심이 될 것이다. 선가귀감에서도 선의 삼요소 중의 하나를 대의심(大疑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의소오(小疑小悟)요 대의대오(大疑大悟)라. 그러니 철저하게 의심하여 대오하도록 힘써야할 것이다.

셋째, 불교의 연기법 자체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연관성을 찾아 궁리함이요, 실천함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석가세존께서 타인과 차별화를 통한 배척과 말살이 아닌 서로를 포용하고 이해하면서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몸소 가르치고 가시었다. 석가세존께서 금세공 춘다가 올리는 독버섯 공양을 먹고 중독되어서 설사를 하고 피를 토하시었다. 이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춘다를 보시고 일찍이 내가 성도할 때 도움이 되었던 소녀의 우유공양과 춘다의 버섯공양이 보시의 공덕에 아무런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시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인연 따라 할 일을 다 했으니 본연의 그 자리로 돌아가리라. 모든 것이 바뀌어가니 게으름 없이 힘쓰라고 모여든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주시고 열반에 드시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말이며 거룩함인가 청정무애한 본래면목 그대로가 아닌가! 항상 타인과 차별화를 통한 배척과 말살이 아닌 서로를 포용하고 이해하면서 상생의 길로 나아가시었던 것이다.

구글 명상지도자 차드 멩 탄이 말했다. “싱가포르에선 불교라면 노인들이 죽을 때가 가까워서 믿는 종교정도로 생각해 종교가 불교라고 하기가 부끄러운 느낌이었는데, 캘리포니아에선 ‘멋지다’라고 해줘서 놀라웠다. 서구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불교가 독선적이지 않고 열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자신의 종교가 불교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 망설이지 않았는가? 왜? 불교가 시대를 리더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져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시대를 리더 못하는 구태가 불교의 본질적인 모습인가? 단호하게 불교만큼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며 시대를 선도한 가르침은 역사상 없었다. 이렇게 혁신적이고 개혁적이었던 불교가 왜 이렇게 고루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 정보화 시대, 생존하고 싶다면 불교를 공부하라.” 고 말하고 싶다.

정태권 tgjeong@kmou.ac.kr

<저작권자 © e불교중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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